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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임호산 2011. 4. 29. 08:28

국민동요인 <산토끼>는 일제 강점기였던 1928년 가을 창녕군 이방면 안리에 있는 이방보통학교(현 이방초등학교)에 재직하던 고(故) 이일래(1903~1979) 선생이 직접 작사,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일래 선생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그가 딸 명주(당시 1세)양을 안고 학교 뒷산인 고장산에 올라가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바로 앞에서 산토끼가 깡충깡충 뛰노는 모습을 보고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우리 민족도 하루 빨리 해방이 되어 저 산토끼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면서
그 자리에서 가락을 흥얼거렸고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오선지에 곡을 만들고 가사를 붙였다고 적고있다.
이렇게 탄생한 '산토끼'는 처음에 이방초등학교 전교생들이 부르기 시작했고 이웃학교를 거쳐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민족혼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토끼 형상인 우리 국토를 연상시키고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항일사상과 동심이 담겨 있고, 일제의 압박 속에 있는 국민의 심정을 의인화해 온 국민들이
즐겨 불렀던 동요 산토끼는 민족감정을 유발시켰다는 이유로 일제가 부르지 못하게 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38년에 나온 '조선동요 작곡집' 영인본(影印本)에 실린 원래 가사는

'산토끼 토끼야 너 어디로 가나/

깡충깡충 뛰어서 너 어디로 가나/

산고개 고개를 넘어 가아서/

토실토실 밤송이 주우러 간단다' 로 되어 있다.

훗날 부르기 쉽고 어감이 좋도록 노랫말이 조금 바뀌어 진 것이다.
현재 이방초등 교정에는 졸업생이 세운 이일래 선생의 흉상을 비롯해 '산토끼' 노래비, 이 선생 관련 각종 기록, 토끼 사육장, 산토끼 벽화 등이 있다.

1928년 이일래 선생이 이방초등학교 재직시절 작곡한 곡으로 938년에 선생의 동요곡을 묶은 ‘조선동요작곡집’이 나왔는데 영문과 삽화, 시편이 실려 있다.

<산토끼>

작사/작곡 : 이일래

 

1절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총깡총 뛰어서

어디를 가느냐

 

2절

산고개 고개를

나혼자 넘어서

토실토실 알밤을

주워서 올테야

 

 

 

 

 

 

 

 

 

 

 

 

 

 

 

 

 

 

 

 

고 이일래선생은 1903년 5월 10일생으로 경남 마산시 성호동 62번지가 본적으로 되어 있으며 마산에서 태어났다.
17세가 되던 1920년도에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서울중동학교에 진학해 졸업을 하게 된다.
이 선생은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으나 본격적으로 음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연한 천도교 낙성식에 참석하게 되면서 부터였다.
거기서 이선생은 김영환 독주회를 보고 감동을 받고 난 뒤 음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김영환씨가 출강한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해 김씨에게서 음악을 지도 받으면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던 이선생은 연희전문학교 재학 때 김씨에게서 2년간 배운 바이올린 솜씨로 YMCA에서 홍난파 선생이 퍼스트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이일래 선생이 세컨드바이올린을, 김영환씨가 피아노를 맡아 트리오를 구성해 연주회를 갖는 등 꾸준한 활동을 펴기도 했다.
이선생은 연희전문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낙향하여 창신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다시 창녕군 이방면 이방보통학교(현 이방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창신보통학교를 재직하면서‘고향’을 작곡한 이선생은 창녕의 이방보통학교에 와서‘산토끼’와 ‘단풍’을 작곡한다.
1936년부터 40년까지 5년간은 마산 제비산에 있던 호주선교사의 어학교사로 재직했고 1940년대 후반에는 일본으로 가 일본대학 예술학원 음악 과에서 본격적인 음악을 1년간 공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귀국 후 이선생은 마산여자 가정학원을 설립해 여성들의 개화운동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학원은 1943년도 폐쇄되었고, 이선생은 이듬해에 만주로 넘어갔다.
만주에서 해방을 맞은 뒤 1947년도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와 경상북도 초대 상공국장으로 취임해 2년간 공직 생활을 한 후 퇴직, 일반서민의 생활로 돌아갔다.
특히 이일래 선생은 마산의 호주선교사 와의 인연으로 영어 실력이 뛰어나 해방 후 미 군정 당시 CIC 마산대장의 통역을 맡기도 했다.
51년 마산 민선시장 선출 때는 청년활동 등 의욕적인 움직임으로 출마설까지 나돌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일래 선생의 음악생활은 연희전문학교의 김영환씨에게서 배운 바이올린을 시작으로 1926년부터 1945년 해방때까지 마산문창교회 성가대를 맡는 등 음악활동을 했다.
당시 문창교회에는 유명한 주기철 목사가 있었는데 주목사의 권유와 도움으로 성가대 지휘와 신앙심에도 열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선생은 호주선교사 어학 교사와 일본대학 예술학원 음악과에 다닐 때 많은 곡들을 작곡했다.
약 1백 여 곡의 노래가 따로 기록된 책자가 있었으나 6.25 당시 모두 분실 됐고 지금은 아쉽지만 조선동요 작곡집에 수록된 동요를 제외하곤 발표된 곡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조선동요 작곡집은 1938년 1천부의 초판을 찍었으나 출판사에서 몽땅 다 가지고 가버려 다음해에 호주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재판 1천부를 다시 찍었다.
이때 이선생은 마산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지고 영어가사를 붙여 2백부는 자신이 가졌으며 7백 여부는 호주 등 세계 여러나라에 보내졌다.
조선동요 작곡집은 우리나라 에서는 홍난파 동요집 다음으로 발행된 소중한 동요집이다.
이일래 선생은 1947년에 15년간의 교직생활을 떠나서 초대 경상북도 상공국장을 맡게 됐으며 이후 임영신씨가 운영했던 중앙대 관사에 머물다 6.25를 만나 소장 중이던 동요집을 단 한권도 남기지 못하고 모두 분실하게 된다.
이선생은 시간이 지나간 뒤 책을 구하기 위해 수소문을 하던 중 마산에 있던 친구가 책을 구해줘 1975년 영인본을 냈다는 것이다.
당시 마산의회예식장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지고 그 해 7월 7일 오후 4시 서울 YMCA회관에서 한국동요 동인회 주최로 복간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이 동요집에는 ‘산토끼’. ‘봄노래’, ‘봄’, ‘해바라기’, ‘노고지리’, ‘엄마생각’, ‘아침’과 ‘시편23’ 등 주옥같은 동요와 성가21곡이 실려 있다.
이선생은 어린시절부터 좋아했으며 평생을 두고 음악을 떠난 1944년 이후에는 사회활동에 비해 음악활동을 소홀히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선생의 성격은 인정이 많고 자상하지만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는 곧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 그의 제자들은 말한다.
이선생은 창녕의 이방보통학교 재직 시 산토끼를 만든 계기가 된 고장산을 자주 올라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혼자서 노을이 질 무렵이면 고장산에 올라가 자주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 아마 당시 일제의 압박 속에 있는 나라의 상황에 대해 서글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였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또한 이선생은 부인과 딸을 데리고 고장산에 올라가 산책을 하는 등 신학문을 공부해 개화청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당시 제자들은 회상한다.
이일래 선생은 1975년을 전후해 첫딸 명주씨의 집인 서울에서 거주했으나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가곡리 202번지로 이사를 해 1979년 가을께 76세의 연세로 작고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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